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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희 사모의 가정상담칼럼] 성폭력과 ‘Me Too’

[심연희 사모의 가정상담칼럼] 성폭력과 ‘Me Too’

 

심연희 사모(RTP 지구촌 교회, Licensed Marriage and Family Therapist)

어릴 적부터 재미있게 보아왔던 미국의 인기 있는 가족 시트콤의 주인공이 많은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의 가해자로 떠오르면서 사회 곳곳에서 숨겨져 왔던 성폭력의 실태들이 속속히 드러나고 있다. 이미 한국에서도 문단, 연극계, 연예계뿐만이 아니라 교계에서 벌어진 성폭력이 고발되고 있다. 사회의 저명인사들에게 당했던 성폭력 희생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Me 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성폭력의 대상이 되었던 아픔을 평생 지우려 애쓰면서 그늘 속으로 숨어버렸던 여성들이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또 다른 차원의 피해를 입을까 봐 주저앉아 입을 다물었던 그들이 일어나고 있다. 가해자가 누구였는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상담소에서 만났던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추행과 성폭행의 경험이 있다. 남성들이 겪은 성폭력의 실태도 만만치 않다. 심리검사를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성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들을 찾는 것이 드물 정도로 심각하다. 이 여성들에게 있어 골목에서 튀어나온 바바리맨이나 숨을 못 쉬도록 승객들로 꽉 찬 버스 안에서 어디선가 자신을 더듬는 손처럼 자잘한 사건들은 충격적이고 부정적인 기억들로 자리하고 있다. 더욱이 어릴 때나 어른이 되어서 경험한 성폭력은 그저 마음먹으면 극복되는 상처가 아니다. 여성들은 그 사건을 통해 죽음을 경험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몸이 침범당하는 순간에 겪는 공포는 죽음과 맞먹는다. 자신 안에서 소중한 무엇인가가 죽는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자신이 존중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자존감, 자신의 아름다움이 좋은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 누군가에 의해서 처절하게 짓밟힌다. 그리고 남겨지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분노와 수치심이다. 내게 일어난 그 끔찍한 일이 내 잘못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이다.

그들은 대부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PTSD)에 시달린다. 전쟁을 겪는 군인들에게 많은 이 증상이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의 강도로 찾아온다.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기억들, 아직도 생생한 장면들, 악몽, 분노, 공포의 감정이 계속되는 것이다. 사람을 기피하게 되고, 작은 일에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걱정, 불안이 계속되고 불면증에도 시달린다. 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 사람들, 물건들을 보면 그때의 충격이 고스란히 되살아날 때도 있다. 숨을 못 쉬거나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심박이 빨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나쁜 기억과 감정을 잊어버리려는 몸부림으로 술,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칼로 긋는 등 자해를 하기도 한다. 성폭력이 일어난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벌하는 것이다. 이러한 증상들은 장기적으로 인간관계, 부부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사람을 피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두려워 폭식으로 몸무게를 늘리고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결혼을 해도 성이 아름다운 선물로 누려져야 할 부부관계가 악몽의 반복으로 자리잡기도 한다. 불감증뿐만이 아니라 배우자가 PTSD의 증상을 다시 불러오고 악화시키는 방아쇠가 된다. 지난 기억에서 오는 분노가 배우자를 향하고, 그 배우자는 거절감에 계속해서 상처받는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서, 잘 몰라서, 상대가 좋아하는 줄 착각해서 벌어졌다는 성폭행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뒤바꾼다. 한 가족의 삶을 짓밟는다. 벌금 몇백만 원과 사과로 씻어지는 범죄가 아니다. 살인이다.

여성의 순결을 강조하는 우리나라의 문화는 성적인 순결을 중요시하는 성경의 가치와 다르지 않다. 결혼 외의 성을 간음이라고 하는 말씀은 성경 곳곳에 분명하다. 그러나 여성의 순결만을 중요시하던 과거의 이중잣대는 묘하게도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에게 수치심이라는 벌을 내린다. 가해자가 분명히 있는데, 이상하게 피해자가 비난받는다. 꼬리를 쳐서, 옷을 잘못 입어서, 행동거지가 단정치 않아서라고 손가락질한다. ‘더러운’ 여자가 된다. 죽음과 맞먹는 공포를 경험한 여성들이 그 끔찍한 범죄의 현장을 차마 고발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주위의 반응은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성에 대해 개방적인 미국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상담소를 찾아온 한 자매는 말한다. 이 자매가 열두어 살이 되면서부터 이모부와 그 아들인 사촌오빠가 번갈아가며 자신을 성폭행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열대여섯이 되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지자 이모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자신을 보호해 줄줄 알았던 어른의 반응에 그녀는 경악한다. 이모는 그녀를 자신의 가정을 파괴한 악마로 몰아갔다. 어떻게 꼬리를 쳤길래 남자들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냐는 것이다. 그녀는 순식간에 온 일가에 진흙탕 분란을 일으킨 메기가 되었다. 그녀는 가족모임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Me Too’ 운동은 가족모임에서, 사회에서 제외되거나 스스로를 격리시킨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용기를 내기 시작하는 목소리이다. 그 사건이 자기 탓이 아니라 분명한 가해자가 있었다는 외침이다. 죄를 드러내고 그 죄의 대상으로 평생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가해자는 유명인사로 승승장구할 때, 오히려 피해자가 정신적 증상을 안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부조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옆에서 이 비슷한 아픔을 아는 사람들이 나서서 서로를 감싸 안기 시작한 사건이다.

우리는 이런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찾아와, 자신이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되어줄 책임이 있다. 쉬쉬 하고 덮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건의 심각성을 직시하는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하다. 나도 그 아픔을 안다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울어줄 책임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가해자의 죄까지 떠안고 마음의 감옥에 갇히지 않도록, 문제를 분명하고 명철하게 구분해 주어야 한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알려줘서 그들의 마음의 짐을 내려놓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아픈 사람에 대해 수군대는 것이 아니라 때린 사람에 대해 함께 분노해주는 사회가, 너무나 당연한 사회가 되어줄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죄를 드러내고 깨끗하게 하고 피해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주는 그 당연한 책임이 우리들의 교회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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