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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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17 19:25 조회8,15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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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심연희 사모
(RTP 지구촌 교회, Licensed Marriage and Family Therapist, Life Plus Family Center 공동대표)
얼마 전 상담소를 찾아온 20대 중반 아가씨의 고민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는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면서 판단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못생겼는지, 얼마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 얼마나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지를 의아해하고 그래서 무시하는 시선을 보낸다. 그래서 일도 할 수가 없고,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갈 수도 없단다. 직장에 가면 자신을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동료들 때문에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얼마 못 가 그만둬버리는 것이 어느새 패턴이 되고 점점 취직하기가 힘들어 졌다. 서류전형이 통과되고 인터뷰라도 하게 되면, 이미 불안감이 극도로 높아져서 무슨 질문을 받았는지, 자기가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정신줄을 놓는다. 이미 인터뷰 전에 자신이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지 걱정이 태산 같아서 긍정적이고 자신감 있고 열정적으로 보여야 하는 자리에서 오히려 공황장애와 같은 극심한 불안감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과 눈도 잘 못 맞추고 사람들이 보이는 관심이 부담스럽다. 조만간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들킬까 하는 조바심으로 사람들과의 접촉은 어떻게든 피하고만 싶다.
이 아가씨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니 어릴 때부터 조용하고 똑똑했다. 책을 좋아했고 공부도 꽤 잘하는 데다가 홀어머니의 말을 잘 듣는 딸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특성 덕에 이 아가씨는 흑인들 사회에서 ‘이상한 아이’로 놀림 받았다. ‘Nerd’, 즉 공부벌레라는 별명은 미국사회, 특히나 흑인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공부벌레는 이 아가씨가 자라난 환경 속에서 분명 ‘정상’이 아닌 ‘이상한’ 부류에 해당되었다. 같은 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똑똑하면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이 아가씨를 놀리거나 왕따 시켰다. 그러면서 이 아이는 혼자 책이나 즐겨 있고 다른 아이들처럼 어울려 놀지 못하는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기만 해도 자신이 이상한 사람인 것을 눈치챌까 봐 가슴이 철렁하다. 이 아가씨가 치열하게 살아온 삶 속에서 배운 것은 ‘자신은 사랑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하고 이상히 여긴다는 굳건한 믿음이 이 아가씨의 삶의 스토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 한 청년은 수련회를 가기 위해 목사님께 자세한 정보를 받았다. 일을 하던 그 자매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수련회 장소로 오지 못했고, 일이 끝난 시간에 혼자 운전을 하고 와야 했다. GPS라는 엄청난 축복이 아직 없었던 그 당시, 밤에 자매 혼자 수련회 장소에 찾아오는 것이 걱정되었던 목사님께서 한 두 번 더 물었다. “오는 길은 알겠니? 괜찮겠어?” “다시 한번 알려줄까? 찾아오는 길이 너무 어둡고 시골이라 힘들텐데…” 몇 번을 확인하고 챙기려 하는 목사님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우리 목사님 자상하기도 하셔라’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자매는 돌연 화를 벌컥 낸다. “목사님! 왜 저를 못 믿으세요!” 너무 화가 나서 씩씩대는 이 자매를 보며 꽤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이 자매, 성질 못쓰겠네 라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한걸음 다가가서 보면 의외의 모습을 알게 된다. 이 자매 안에 잠재된 분노의 원인이 있다. 이 자매에게는 늘 잘나가는 동생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을 편애하는 아버지와 막내에게는 꼼짝을 못하는 어머니 아래서 이 자매는 나이 값 못하는 장녀가 되버린 것이다. 뭐든 척척 잘해내는 남동생에 비해, 자기는 늘 20% 부족한 자식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누가 “할 수 있겠어?”라는 질문을 하면 ‘난 널 못 믿어’로 들리는 것이다. “뭐가 필요해?”라고 물으면 ‘왜 그거 하나 알아서 똑바로 못하고..’로 알아듣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색을 입힌 썬글라스를 쓰고 산다. 자라면서 자기만의 Filter가 형성되고 그 필터를 통해 보고 듣는다. 자기만의 Life script, 즉 자기만의 스토리를 쓰며 산다. 그 대본이 형성되면, 그 대본에 맞는 증거를 수집하며 산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야. 사람들이 다 날 싫어해.” “사람들이 날 못 믿어.” “나는 아무리 애써도 안돼.” “I am not good enough.” “사람들이 내 뒤에서 내 흉을 봐.” “사람들은 날 버릴거야, 우리 엄마 아빠처럼.” 자기만의 스토리는 그 사람이 자라온 문화, 어릴 때 경험, 자기의 성격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일단 이 스토리가 써지면 그 스토리에 맞지 않는 모든 다른 ‘긍정적 증거’들은 무시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믿어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많은 사람들을 보기 보다는, 날 무시하는 듯한 한 두 사람의 태도 때문에 다시 한번 확신한다. 나는 여전히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상담을 하면서 전환점이 되는 순간은 보통 희생양의 자리(victim position)에서 빠져 나오기로 결심하는 때이다. 우리 부모 때문에, 그 때 사회 분위기 때문에, 문화 때문에, 내 남편, 아내 때문에 내 인생이 꼬였다고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며 슬퍼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내가 써 내려온 스토리의 저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 대본에 너무 사로잡혀서, 내 삶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온 많은 사람들은 잊어버렸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토리를 새롭게 쓰겠다는 결심의 순간이 바로 치유가 시작되는 순간이 된다.
아픈 동생들이 있는 가정의 장녀로 태어나 우리 가정의 체면을 세울 유일한 보루로 자랐던 필자의 스토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늘 뭔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잘해도 부모님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공부를 했고 일을 했고 어느 순간에 사모가 되었다. 이제는 부모 뿐만이 아니라 많은 교인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고 내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으로 나를 자꾸 밀어 넣었다. 도저히 그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던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난 늘 부족하다는 스토리를 매일 반복하며 절망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나의 Life Script가 얼마나 패배감과 자기연민에 갇혀져 있는지 보게 하셨다. 계속 슬퍼하고 내 부모와 세상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투덜거려봐야 별로 달라질게 없음을 깨닫게 하셨다. 이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내게 매일 새로운 스토리를 쓰게 하신다. “너는 내 자녀이다 (요 3:16)”, “내가 너와 함께 한다(사 41:10)”,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다 (벧전 2:9).” 나의 스토리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어둡고 아팠던 나의 과거가 아니다. 바로 이 순간, 오늘, 하나님과 함께 쓰는 Life script가 클라이맥스이며, 그 분을 대면하여 만나게 되는 그 날이 또한 클라이맥스이다. 이제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낡은 썬글라스를 바꿔 낄 때가 됐다. 넓고 크고 총천연색으로 채색된 세상을 똑바로 대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썬글라스로… 그 순간에 나를 이렇게 망가뜨린 세상은 어느새 만만해진다. 그렇게 높게 보이던 산은 내 놀이터가 된다. 나를 집어삼킬 듯 했던 괴물은 나의 ‘밥’이 된다. 하나님께서 써가시는 대역사의 서사시에 한 부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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